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폭압을 일삼던 연산군이 축출되는 1506년의 중종반정은 사림파에게도 새로운 정치적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써 엉겁결에 남의 등에 업혀 군주가 된 중종은, 아무런 힘이 없어 반정공신들에 의해서
조광조 출생 전후 조선 전기의 시대상황은 국가의 중심 권력이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 라 국가를 이끌어 가는 유교적 명분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종반정의 주역들은 동시에 연산군대의 중신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반정 이후 정국공신에 책 봉되어 많은 특혜를 받고 중
, 10년 8월 丙子
중종의 주목을 받았고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그를 통해 권력기반의 안정화를 꾀하였고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였다.
2등으로 급제하여 중종의 주목을 받았고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그를 통해 권력기반의 안정화를 꾀하였고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였다.
중종으로 하여금 훈구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의 신장을 꾀하려는 자구책을 강구케 하였고 그 한 방법으로 중종은 무오, 갑자사화 등으로 물러났던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사림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중종 초기의 개혁 정치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조광조를